거의없다's Blog
새벽 4시의 기적

난 신데렐라 스토리를 아주 싫어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거의 증오하는 수준이다.
전국민의 절반이 봤다는 "파리의 연인"을, 나는 단 1회밖에 보지 못했다. 그 1회시청에 도전하는 것도 거의 차력에 가까운 인내력을 요하는 일이었고, 결국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말았다.


눈물이 날 것같은, 유치찬란함의 극치를 달리는 대사들을 읊어대던 배우들이 너무 안쓰러운 건 차치하더라도(나라면 억만금을 준대도 그런 드라마에 출연.. 하겠지.흠흠)
모든 상황이 너무나 뻐~언 해서 도대체 1g의 긴장감이나 기대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안일함은, 도저히 그 뻔뻔함이 화가 나서 봐줄 수가 없었다.

박신양이 멋있었다고? 난 불쌍해서 죽는줄 알았다..



어디 파리의 연인 뿐이랴. 어느 채널을 돌리건 등장인물과 배경만 바뀔 뿐, 지치지도 않고 줄창 쏟아져 나오는 ‘재벌 2세들의 돈없고 불쌍한 여자 구제하기’ 스토리는 나처럼 보지 않는 사람도, 인제 정말 신물이 난다.

아무런 정보 없이 단 1회 방송분의 절반 가량만 시청해도, 앞뒤전후의 사정과 “쟤랑 얘랑 잘되겠네.” “쟤는 나중에 병으로 죽겠는데.” “저사람이 쟤 엄마지?” “저 연인들 사실은 형제겠군.”식의 스포일러를 죄다 알수 있는 그런 스토리를, 꼭꼭 챙겨보는 열성적인 시청자들은 항상 내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그게 정말 재미있을까? (진짜 궁금해서 그런다. 비웃는 것이 아니다.)

더 고약한 것은, 그런 식의 이야기는 굿월의 “주사기 이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보는 사람의 사고를 알게 모르게 정형화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얼마전에 ‘애인이 있는 당신, 재벌 2세가 청혼한다면?’이라는 질문에 참가한 여성들의 60%가 ‘재벌2세와 결혼한다.’라는 대답을 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본적이 있다. 나머지는? ‘남자친구와 결혼한다.’ 20%, ‘심각하게 고민한다.’ 20%.(대충 맞을 거다. 이성을 잃은 상태라서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리 말도 안되는 내용이라도, 역시 반복학습은 효과 최고다.

자꾸 보면 현실과 2억광년 떨어진 이야기임을 잊어먹는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혼자 집에서 탱탱 놀며 OCN을 시청하고 있었는데, 귀여운 여인을 틀어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신데렐라 판타지라면, 이건 거의 반지의 제왕급 아닌가. 바이블답게 역시 매끈하게 잘 만들어 놓긴 했다. 별 생각없이 쳐다보다가 끝까지 다 보게 됐다.

흰머리 아저씨 리차드 기어가 섹시하다는 말에 별로 동의 못했었는데, 쪼금 젊었을때의 모습을 보니, 맞다. 섹시하다. 역시 사람은 한창때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는 모양이다.
줄리아의 시원한 미소도 그때가 훨씬 빛나는 것 같다. 단, 예나 지금이나 어기적거리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꽤나 맘에 들지 않는다. 오션스 일레븐의 그 우아한 등장을 단번에 산산조각 내버린 그 걸음걸이, 어떻게 교정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까?

이 먼 나라의 드라마들까지 지겹도록 우려먹게 만드는 설정들이 여기에 다 있었다. 역시 원조다.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재벌 2세. 알고보면 따뜻한 사람이지만 당연히 가슴속에 말 못할 아픔을 가지고 있다. 더더욱 당연하게도 여주인공을 만나서 상처는 치유되고, 새 사람이된다. 단 일주일만에 성격을 고쳐질 성격을 서른이 넘게 가지고 살다니, 고소공포증보다 자폐증이 더 어울리는 것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 왜 재벌집안들은 그렇게들 가족관계가 안 좋은 거지? 아버지와 사이 좋은 재벌 2세는 단 한번도 못본 것 같다.

줄리아는 영화에서 창녀지만, 사실은 모든 남자들의 이상형이다.
착하고 매력적이며 순종적이고 예쁜데다가 귀여우면서 섹시하기까지 하고 만나는 사람을 죄다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릴만큼 성격도 좋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스스로 이쁘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거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 아닐 수 없다.)


지가 이쁜걸 잘 모르는 줄리아




성격적으로 문제가 없는 남자주인공이 없는 것처럼, 못된 여자주인공은 단 한명도 없다.
그런데 왜 창녀가 됐나? 남자 잘못 만나서.
결론적으로 또 남자 한번 제대로 만나서 구겨졌던 인생 쫙 편다. 여성단체들 이영화보고 발끈하지 않았을까?

여기도 둘의 사랑을 방해하는 악역이 있다. 역시나 가까운 곳에. 그래도 새엄마는 아니라서 좀 신선했다.

조력자? 있다. 처음엔 여주인공을 싫어하다가 결국 그녀의 편이 되는 호텔 지배인.

괜히 나와서 웃기지도 않는 수다만 떨고 사라지는 드라마속 주인공의 친구들과는 달리, 줄리아의 친구는 나름대로 있을 이유와 비중이 좀 있는 인물이다. 나와야 할 곳에서만 등장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여자들을 위한 판타지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남자들을 위한 판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속의 리차드는 돈도 우라지게 많고, 잘생기기까지 하다. 가는곳마다 귀빈대접에 여자들은 서로 달려들고 운도 기가막히게 좋아서, 어쩌다 만난 창녀는 줄리아 로버츠다. 허허.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남자가 있을까?

되는 놈은 길거리에서 잡아도 저런 여자가 잡힌다

2005/08/30 12:35 2005/08/30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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