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없다's Blog
새벽 4시의 기적

정전과 함께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란제리 여인네들의 아슬아슬한 몸매때문에
우리셋은 웬지모를 상실감을 느끼며(...) 벌린 주둥이와 굽은 허리, 치켜든 턱을 수습하지 못하고 멍하게 전원이 나간 화면을 약 4초간 응시했다.
아, 아쉽다..


프로폐셔널 시청자 박모군이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시며 입을 열었다.

"7번인가 8번인가 공 들고 뛰던 애 브래지어 벗겨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안돼겠다 슈퍼 가자."


"응? 슈퍼엔 왜?"


박모군이 왜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왜긴 왜야? 건전지사러 가야지."


"건전지?"


박군은 짜증을 냈다. '이런 멍청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들을 보았나.'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아 씨발 TV에 건전지라도 넣어서 틀어야 할거 아냐!!!"



더헉..... -_-;; 이새끼가 어디 베트남에서 살다 왔나.

나와 한모군은 매우 흥분했다. 우리는 넘어진 상대의 실수를 인정하고 일으켜 세우는 성격들하고는 거리가 아주 멀었고, 상대가 넘어졌을 때를 노려 육중하게 밟을 뿐 아니라 가끔 심심하면 발을 걸어 넘어뜨린 후에 밟기도 하는 성격들이었으므로.



푹풍같은 비웃음과 욕의 융단폭격을 얻어맞고 나서 박모군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끝끝내 한마디를 붙였다.


"우리집 TV는 뒤에 건전지 넣는거 있던데...."


"안닥쳐? 아직도 할말이 있어?" "시발 아예 냉장고랑 컴퓨터도 건전지 넣고 한번 켜보지 왜." 등등의 욕으로 다시한번 방안을 가득 채우고나서야, 아직도 뭔가 억울한 표정으로 박군은 입을 다물었다. (근데 정말 궁금하다. 건전지 넣어서 켜는 TV가 있기는 있는건가?)


"근데 뭐 하냐."

"글쎄... 고스톱이나 한판 치까."

"어. 그럴까? 만원빵 해서 저녁내기 어때."

"콜. 야 박군 어때."



박군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 고스톱 칠줄 몰라."



-_-......이런 시팔.


"야 이새끼야!! 너 여자 꼬시는 거랑 꼬신 여자랑 여관가는 거 말고 할줄 아는게 도대체 뭐야?(근데 그게 젤부러워 젠장) 이새끼는 뭐 데리고 있어봐야(저, 저기 붙어사는 건 넌데...-_-) 밥하는거 말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시팔."

"저번엔 싸이월드를 '씨월드?' 라더만 아무래도 섬에서 살다왔어 저새끼가. 니네 섬에선 고스톱도 안치고 싸이질도 안하고 건전지 넣은 TV만 줄창 보냐?"



또 미안한 표정으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드는 박군. 뭐 찾는 거지?


"이거 하고 놀자."


이게 뭔가?


이, 이건 전설의....





시, 신선한데....?

그건 그렇고 박군 너의 캐릭터는 도대체 뭐냐, 자취방에 브루마블 게임을 챙겨 오는 센스라니...

어쨌든 지능지수 비슷한 세 명이 하면 묵찌빠도 재미있는 법. 우리들은 한동안 정신을 잃고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우주비행기를 타고 황금열쇠를 뒤집었다.

브루마블 우습게 보지 말자. 더럽게 재미있더라..-_-
지나치게 몰입해 버린 우리의 게임을 곧 시합이 되었고 시합은 또 목숨건 혈투가 되었다.

"좀 배고프지 않아?"

"야 잠시 휴전. 라면좀 끓여먹고 계속해."

라면을 끓여 먹었다.

"어두워져서 돈이 얼마짜린지 잘 모르겠는데."

"집 어디에 초같은거 없어? 찾아봐바 좀."

초를 가져다 불을 붙였다.
눈에 핏발들이 서기 시작했고 골초 한모군은 남의 땅에 걸려 통행료를 낼 때마다 한숨을 푹푹쉬며 담배에 불을 당겼으며 방 안은 촛불 3개의 흔들리는 불빛과 흡연자 세명이(거의없다는 당시 흡연자였음) 뿜어낸 담배연기로 가득 찬 가운데 딸각거리는 주사위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누군가 보았다면 백퍼센트 이곳을 아편굴이나 마약쟁이들의 소굴로 단정짓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으리라.

결국 악으로 깡으로 버티던 거의없다가 파산을 맞으면서,역시 땅값은 대한민국이 최고라는 불변의 진리를 확인시키듯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보유하고 있던 한모군의 승리로 게임을 끝났다.
한군은 뛸듯이 기뻐했다.

"크하하하 역시 난 뭘 하든 져본적이 없다니까!!! 내가 일등이니까 2등 삼천원 3등 칠천원 맞지? 얼렁 돈들 내."





근데 뭔가 이상했다.

"야, 근데 이거 뭐 내기였어? 저녁값 내기 아니었어?"

"응."



.......한군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매우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밤은 점점 깊어갔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안도 따라서 어두워졌다. 아직도 잠을 자기엔 이른 시간이었고 마침 담배도 떨어져서 우리는 무작정 슬리퍼를 직직 끌고 집 밖으로 나섰다.
갑자기 박모군이 제안했다.

"야 운동좀 하자. 달리기 어때."

뭔가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처음엔 욕부터 먹기 마련.

"무슨 쓰레빠 신고 달리기야? 너나 뛰어."
"난 보병이라 군대에서 지겹게 뛰었거든? 취사병 했던 너나 뛰세요."

그러나 박군은 여자건 남자건 꼬시는 데는 도가 튼 인물.
군대를 제대한 후 뱃살이 점점 늘어 이제는 둥글둥글한 아저씨의 풍모를 띄어가고 있는 한군부터 살살 꼬시기 시작했다.

"야. 너 남순이(한군의 여자친구, 가명)랑 여름에 바닷가 간다며. 운동 안할거야?"

한군이 움찔한다.
"그, 그럴까?"

그러나 나는 발끈한다. 여름에 바닷가는 고사하고 강가에 같이 갈 여자친구님도 없단말이다 나는!!!
"아 무슨 운동이야아아!! 귀찮게!!"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버린 상태. 박군 씩 웃으며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진다.
"그럼 넌 하지마. 우리끼리 할께."



헉-_-;; 씨발.

"....아 씨바 알았어 해 해!"

아... 외로운건 싫어 씨바.


그래서 우리는 아파트 뒷길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아파트 뒷쪽 도로에는 점점이 가로등이 켜져 있었고 차들도 그리 많이 지나다니지 않아 뛰기에 적절했고 공기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슬리퍼를 찍찍 끌며 한명은 런닝, 또 한명은 청바지, 다른 한명은 줄무늬 반바지를 입고 달리는 셋의 모습은 심히 보기 좋지는 않았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좀 달릴만 해질 무렵,


"퍽"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뒷쪽에서 무시무시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으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은 다름아닌 박군 이었고(!) 그는 양손으로 오른쪽 발목을 붙잡고 길 옆으로 자빠져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장난이라고 보기엔 곧 죽을 것 같은 그 표정이 엄청난 데시벨의 고함섞인 비명이 너무 진지했다.

"뭐, 뭐야? 왜그래 너?"

"발목, 발목... "

박군의 발목을 보고 눈알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온통 피였다!!
근데 정말 내가 놀란 까닭은, 그 피가 그냥 피가 아니라 정말 진득진득한 선지피였기 때문이다. 트럭이 갈고 간 고양이의 몸에서 쥐어 짜낸 것처럼 흘러나오는 그런, 끈끈하고 죽죽 늘어지는 선지피.
내 상식으로 왠만한 상처에선 저런 피가 나오지 않는다.

넘어지기 전에 박군이 밟은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은 가로등 불빛이 희미한 곳에 있어 잘 보이지 않았는데, 그 주변도 온통 피였다. 끈적끈적한 피!!

한군이 놀라서 소리쳤다. 그는 전방 수색부대 출신이다.


"바, 발목지뢰다?"

"어헉? 발목지뢰?"


설마.. 여긴 전방도 아니고 강원도도 아니고 천안인데?
발목지뢰 같은게 왜 여기 있어?


나는 박군이 밟아 터트린 그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슬리퍼 바닥에 박군의 끈적끈적한 피가 잔뜩 묻어 질척거렸고 뒤에선 박군의 힘없는 말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바. 발에 감각이 없어."


좆됐다 박군... 설마 발목절단...........? 이제 박군의 화려한 시절은 가는거야?
저,정말 지뢰일까? 한번 더 터지는 건 아니겠지? 나는 조금더 가까이 갔다.
깨진 조각들과 파편들이 보이고, 작은 글씨가 보였다.

























"임금님표 순창 고추장"
"맛있게 맵네?"


.........-_-.........





............풉.





피에스 : 박군의 발바닥엔 엄지손톱만한 플라스틱 조각이 박혀있었다. 무~울론 발목엔 아무런 상처도 없었고.. 박군, 대체 발목에 감각이 없다는 얘긴 뭐였어?
2006/02/13 18:08 2006/02/1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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