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는 대학 선배가 한명 있다.
말이 별로 없고 과묵한 성격의 그는 대학생활 중에 만난 아리따운 여자 후배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게 되었고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꽤 오랜시간 공을 들였다.
그다지 깔끔하고 센스있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그의 진심은 그녀에게 전해졌고 그녀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여 둘은 애인사이가 되었다.
보통 얼마 못가서 헤어져 강의실에서 마주칠때마다 난감해지는 캠퍼스 커플들 같지 않게 둘은 함께 졸업장을 받고 학교를 떠날 때까지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남았고 함께 시험을 준비하게 된 까닭에 고시촌에선 동거를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를 알며 학교에선 내 여자친구와 함께 그들과 어울리곤 했던 나는 가끔 두사람의 집을 찾아가 그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둘은 함께 있는것에 만족하는 듯했고 행복한 듯 했다.
귀싸대기 맞고 한쪽으로 돌아간 안경마냥 삐뚤어져 단점부터 찾아내는 내 성격상 그렇지 않은 점도 많았지만
가끔씩은 그들이 부러웠다. 하루 24시간, 아침에 눈꼽떼며 일어나서 발가락 사이에 무좀연고를 바르고 잠자리에 들 시간까지 함께 있고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부러웠고 그런 사람을 만나버린 그들 인생의 타이밍도 부러웠고 함께 살아버릴 생각을 한 그들의 용기도 부러웠으며 연극을 그만두고 맨 얼굴로 서로 똥누는 소리 들어가며 역사를 쓰면서도 변치않는 그들의 마음도 부러웠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변하기 마련인지
지방에 있는 집으로 내려간 여자가 별안간 이별을 통보했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헤어지자고 말했다. 둘 사이에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두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지만 여자는 이미 오래전에 자신의 마음이 변했으며 함께 지내온 그동안이 고통스러웠다고,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남자는 며칠전만해도 옆에서 함께 눈을 뜨던 그녀가 그동안의 시간들을 모조리 부정해 버리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고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그녀를 포기할수 없었다. 그는 여자의 마음이 잠시 흔들리고 있는 것 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절대로 헤어지는 일 따위는 없을것이며 행복했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사랑이었으며 절대로 변할수 없다고.
남자는 여자에게 찾아갔으며 애원하고 매달리고 죽어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하지만 여자는 서로에게 더 이상 상처도 안 좋은 기억도 남기지 말고 이쯤에서 헤어지자고 말하며 그를 외면했다. 다른 사람이 생긴거니? 아냐. 그런건 아냐.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되어버린 남자는 그녀를 보기 위해, 그녀에게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려 보기 위해 그녀의 주의를 맴돌았다. 다른 모든 것을 팽개쳤으며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말라버린 몸도 돌보지 않았다.
여자와 몇 번의 대화를 통해 그녀의 마음이 확실히 떠났으며, 더 이상 그녀에게 매달리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더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얻게 된 나는 그에게 해줄 말을 미리 준비해 놓았었다.
형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어쩌겠어요... 사람 마음은 인력으로 되는게 아니라는데. 뭐 걔가 그렇게 형 인생을 좌지우지할만큼 그렇게 엄청나고 거대한 존재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힘들겠지만 이제 그만 잊어 버리세요. 좋게 기억하면서.
하지만 난 준비했던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내가, 과연 그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그렇게 쉽게 그에게 잊으라고 말할수 있을까. 인생을 통틀어 가장 소중할지도 모르는 것을 잃을 판에, 그걸 찾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에게 그냥 될 일이 아니니까 포기하라고 말해 버릴 수 있을까?
목숨을 걸 만큼, 그렇게 안타까워 미칠 것 같은 사랑을 해 본적도 없고 그것 때문에 용기를 내 본적도 없으면서. 그 소중함을 알지도 못하는 나는,
“몸은 좀 챙기세요. 끼니도 꼭 챙겨 드시고..” 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같이 변하거나 같이 변하지 않거나 어쨌건 함께 움직인다면 좋을텐데
어떤 것은 변하지만 어떤 것은 변하지 않아서, 같은 길에 누구는 발자국을 찍고 누구는 바퀴자국을 남긴다.
속도든 질량이든 부피건간에 그 차이 때문에 오늘은 참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