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없다's Blog
새벽 4시의 기적

독후감.

비스듬하게 책 읽기 2006/10/26 12:06 by 거의없다

우울과 몽상

대책없는 무식을 자신있게 드러내는 멘트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부담을 안고 말하자면.
난 [검은 고양이]와 [모르그 가의 살인]를 제외한 포우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드랬다.

별로 안 땡겼기 때문이다.

마치 500원짜리 드래곤볼 만화책에 붙어 따라온, 전혀 반갑지 않은 북두신권 1편처럼
팬더 문고의 [셜록 홈즈]시리즈 뒷편에 불청객적 입지를 자랑하던 단편 [검은 고양이]는 그닥 위트도 매력도 없고, 꽉꽉 들어찬 특유의 자책적 우울함과 자학적 공포만이 엄청난 밀도를 자랑하며 홈즈와 왓슨의 신나는 모험담을 즐기던 소년의 기분을 런던의 날씨마냥 흐리텁텁하고 찝찝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모르그 가의 살인] 또한,
앨러리 퀸처럼 앞장을 몇번씩 들추게 만드는 것도 아니었고, 홈즈같은 매력적인 탐정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요, 브라운 신부의 뒷담처럼 이마를 치는 치밀함도 없이 그냥 그저 그런 추리소설을 넘지 못한 채 기억되어 있다.

현대 소설의 판을 짰건 말건.
추리소설의 시조건 말건.
당체 땡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내가 단편이든 중편이든 장편이든(사실 장편은 없다) 포우의 소설을 싹 모아놓은 [우울과 몽상]을 구입한 것은,
뭔가 [블레이드 러너]를 보지 않았으면서 사이버 펑크를 논하고
[영웅문]을 읽지 않았으면서 무협지에 열광하는 듯한
왠지 기초없어 보이는 자세를 탈피하고자 하는.
"이쯤에서 한번쯤 싹 읽어주지 뭐."식의,
대가의 소설을 대하는 것치곤 대단히, 싸가지없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대박세일!! 반값에 판매!! 물론 요런 이유도 있었고...-_-;;

결국, 반값 15000원에 집으로 공수된 포의 소설 전집 [우울과 몽상]을 거의 한달동안
백과사전이나 소법전에 전혀 꿀리지 않는 두께와 무게,
"깔끔하다" 말고는 어떤 수식어도 붙일 수 없는 장례식 복장적인 표지(좀.. 다르게 만들수도 있지 않았을까),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곧 뒤틀려버릴 것 같은 척추(책장을 묶은 곳을 말하는 것임) 때문에
가방에 넣고 다니지도 못하고, 화장실에도 들고 가지 못하고
상당히조심스런 자세로 읽어나간 소감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못 하겠다.

씨바 한두편도 아니고.... 이걸 무슨 재주로 짧게 표현한단 말이냐.
한달동안 틈틈이, 짬짬이 조각조각 한편씩 줄기차게 읽어나간 소감은,
놀이동산스럽게도 "꿈과 환상의 세계를 모험"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온갖 기괴하고 엉뚱한 짓거리와 공상만을 일삼는 천하의 구라쟁이 룸메이트와 함께 살면서 매일밤 잠들기 전에 그의 이야기를 듣다 밤을 세운 후, 이걸 도대체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는 기분이고
이제야 뭔가 미뤄놓았던 일들을 처분한 개운한 기분이기도 하며
너무 똑똑한사람과 한참동안 이야기하며 못 알아들은 부분은 미소와 알아듣는 척으로 일관하다 보니
결국은 별로 알아들은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기분이기도 하면서
어렸을 적, 덜덜 떨면서 [귀곡성]을 시청했던 그때의 심정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명불허전은 언제나 맞는 이야기다.
"수십년이 지나야 인정받을만한 정도로 압도적으로 앞서나간 사람, 혹은 그 이유로 동시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외롭고 척박하게 살아야 했던 사람" 들을 흔히 일컬어 불운한 천재 라고 한다면
포우야 말로 그 명칭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그가 얼마나 척박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가 얼마나 앞서 나갔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2006/10/26 12:06 2006/10/26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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