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때처럼 저의 애마,R-2000에 올라 느긋하게 퇴근길에 나섰던 지난 금요일이었더랍니다. (아직도 모르시는 분을 위해, 없다는 자출족입니다.자전거출근족이죠) 항상 애용하는 길을 따라 한강 자전거 도로로 접어든 없다는,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Europe의 Final countdown을 들으며, 기분좋게 온몸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강바람을 느끼며 슬슬 폐달에 힘을 주었습니다. 해가 아직 지지 않아 남아있는 햇볕이 따스하게 어깨에 내려앉았고 온도는 약간 땀을 흘리면 딱 상쾌할 정도로 적정해서, 모든 상황은 최적이었습니다.
속도계의 속도가 시족 20킬로대에서 30킬로대로 넘어가고, 다리에 기분좋은 뻐근함이 느껴질 찰나.
자전거 한대가 저의 옆을 휙 지나쳐 앞으로 달려나갔습니다. 힐끗 쳐다보니 스캇 서브20 하이브리드 09년식. 약 80만원대의 고가(물론 80만원대가 고가야? 언제부터 고가야?라고 비웃으실 자전거 고수들 많습니다만...애마 두마리 모두 순정상태로 40만원대인 저로선 고가라고 해야 자존심이 안 상합니다. 80만원대가 저가자전거라면, 저는 초저가 자전거 이용자란 말입니까? 흥!!)자전거이며, 하이드로품 알로이튜브 26프레임과 시마노 mc40-8 변속레버, 24단 변속기어와 V자 브레이크를 추가한 스캇의 하이브리드 신모델! 어라? 안장이랑 폐달은업그레이드 하셨군. 돈좀 들었겠어? ....아, 이게 아니지.
지금 저 놈께서 날 앞질렀어? 응?
하나 쓰잘데기 없는 오기가 발동한 없다. 발에 힘을 줍니다. 자전거 좋다고 자랑하는 거야? 앙? 니가 날 앞질러? 지금 미니 스프린터라고, 바퀴 작다고 무시하는 거야? 작아도 스프린터야 스프린터!! 내가 더 빨라!!!(저,정말 유치한 놈이다...)
허벅지에 불이 나게 폐달을 돌려댄 없다.속도계가 시속 36킬로미터를 나타내면서, 다시 그 스캇을 휙 앞질렀습니다. 스쳐가는 짧은 순간에도 옆을 휙 쳐다보며 썩소를 날려주는 센스를 잊지 않은 없다(잘났다) 허벅지와 무릎이 질러대는 통증의 비명을 애써 무시하며 앞서 달리기 시작합니다. 후훗.
그러나 저쪽 스캇 운전자도 그닥 원만한 성격은 못 되나 봅니다. 사나운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절 앞지릅니다.
날아오는 썩소. 치솟는 굴욕감. 무한대로 증폭되는 오기. 이런젠장. 내가 오늘 임자를 만났구나. 좋아.너도 오늘 임자 만났다. 오늘 너랑 나랑 원운동으로 허벅지근육이 파열된 최초의 인간 두 명으로 사이좋게 등록되어 보자꾸나.
미니스프린터의 최대장점은 바로 순간가속 능력!! 내리막길에 접어든 틈을 타 다시 엄청난 폐달질, 그러니까 평소속력 + 아까 슬슬 속력을 내던 평균최고속도 + 아까 앞지를 때의 최고속도. 거기에 내리막길을 이용한 순간가속 최고속력을 더한 속력을 내기 위해 엄청난 양의 폐달질이 가해지고, 자전거의 체인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돌아갑니다. 촤르르르륵!!
드디어 순간최고속력에 들어선 없다. 시속 40킬로미터의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스캇을 앞지릅니다. 휙!
으하하하하하하하하!!! 바퀴 큰 자전거는 절대 낼수 없는 속력이지!! 어때? 죽이지? 따라올테면 따라왑!!
....따라옵니다!! 이 미...친 놈!! 진짜로 따라 옵니다!! 뭐 이런게 다 있어!! 퇴근길 자전거에 이렇게 목숨거는 또라이가 어디있어!!(저,저기, 너도 그렇잖아..) 바로 똥꼬 끝까지 따라온 그 순종 또라이를 다시 떨쳐놓기 위해, 없다 거기서 더 밟습니다. 정말 발악하는 수준으로, 죽어라고 밟습니다. 속도는 시속 40킬로미터를 넘어 43,44... 로 달려갑니다. 허벅지와 도가니의 통증은 점점더 심해지고, 호흡곤란의 경지에 다다릅니다. 힘들어서 뒤질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이기고 볼 일. 죽자,죽어!!
그런데 스캇 이 넘, 정말 죽자고 따라붙습니다. 물론 도로에선 로드바이크가 왕이지만 하이브리드도 만만치 않게 빠른 자전거이며, 저 못지 않은 엄청난 폐달질을 하고 있습니다.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은 부릅뜨고 다리를 쥐불놀이하듯 돌려 대고 있습니다. 저, 저 놈은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산책하는 사람들이 적은 자전거 도로 구간이 끝나가는 지점에 다다렀을 무렵, 그 넘과 저는 그야말로 박빙의 승부를 벌이며 여의도 한강공원으로 진입했습니다.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고, 시속 42킬로미터라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나가고 있습니다 - 자전거로 시속 40킬로미터 넘어 보신 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내면 안 돼는 속도"입니다. 위험하기 짝이 없어요. 오토바이로 시속 120정도 될까요? - 산책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눈에 띕니다. 위험할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멈출수가 없게 되버렸습니다. 차라리 이 속도면 그냥 안 줄이고 휙 지나가 버리는 게 낫겠다-라는 위험천만한 생각. 달려 나갑니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실은 그냥 이 넘한테 지면 잠이 안올것 같아.라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지요.)
속도계를 힐끗 보고 난 다음 앞으로 시선을 돌린 없다, 느긋한 걸음으로 자전거도로를 횡단 중이시던 할아버지를 보고 맙니다. 나란히 달리던 그 넘과 저 중에 하필이면 제 앞쪽에서 횡단중이십니다. 너무 빠른 속력으로 할아버지가 저한테 나가 옵니다. 크악!!
브레이크?늦었습니다. 지금 잡아도 충돌을 피할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충돌? 저야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최소 전치6주는 나올 겁니다. 시속 40킬로미터로 달려오던 쇳덩이(실은 플라스틱 덩어리)에 맞은 노인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병풍 뒤에 누우시게 되지 않을까요? 할아버지 옆쪽엔 약 20센티미터 높이의 경계석을 쌓아 만든 턱 옆으로 잔디밭이 있습니다. 지금 핸들을 꺾으면 저만 저 경계석과 충돌합니다. 안 꺾으면 할아버지와 충돌, 꺾으면 나 혼자 경계석과 충돌.
당연히 나 혼자 다쳐야지. 똑같이 다쳐도 아무래도 내가 젊으니까... 등등의 심정으로 핸들을 꺾어버립니다.
할아버지와 약 5센티미터의 틈을 남기고 스쳐간 없다. 이번엔 엄청난 속도로 전방 45도 각도에서 달려오는 경계석을 봅니다. 이건 어떻게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좆됐다. 내가 오늘 헬멧을 썼나? 썼군. 그럼 머리는 안 다칠 수 있겠군. 다행이다. 그럼 팔이나 다리가 부러질까? 부러질때 아프겠지? 튕겨서 날아갈까? 날아가더라도 최대한 안 다치려면 자세를 어떻게 잡지? 웅크릴까? 쫙 펴서 날아봐? 어쨌든 졸라 아프겠지. 어쩐지 암 사고 없이 두달이나 잘 타고 간다 싶더라니.. 첫 사고구나. 젠장 근데 첫 사고치곤 너무 크게 나는거 아냐? ....인간이란 대단합니다. 1초도 안돼는 시간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누군가 비명을 지릅니다. "어어엇..!!"
그리고 전 눈을 감아 버립니다.
충돌. 퍽.
다음 순간. 없다는 자전거를 타고 잔디밭을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전거는 잔디밭을 달려가다가 덜덜덜덜 대며 멈춥니다. 그리고 저는 - 그 위에 멍하니 앉아있는 저는... 멀쩡하네요? 어? 뭐야? 왜 멀쩡하지? 뒤를 돌아봅니다. 틈틈히 붙어있는 경계석 사이로, 정말 딱 자전거 바퀴 하나 지나갈 정도로 깨져있는 경계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설마.. 저 사이로 지나온거야?
진짜? 저 사이로? 정말 작은 틈인데?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자전거로 저 틈사이에 바퀴를 집어넣고 빠져나오기는 엄청 어려울 것 같은데? 저기를 그냥 휙 지나쳐 온거야? 정말? 진짜로? 그래서 잔디밭에 들어와서 달리다가 멈춘거야?
없다, 이런 표현을 정말 좋아하진 않지만 조상이 돌봤나 봅니다. 그 속력으로, 그런 충돌이라면 적어도 튕겨나가서 10미터는 날아가야 정상이고, 형편없이 처박혀서 어디 한두군데 부러져 - 정말 재수가 없다면 목이 부러질수도 - 붕대로 코디를 하게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찰과상 하나 없이 살았습니다.
가슴이 미친듯이 뛰어 진정이 안 돼서, 자전거에서 내려 털석 주저앉았습니다. 물통을 꺼내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습니다.
없다, 두번 살았습니다. 하늘이 도와서 - 이렇게밖엔 표현이 안돼는 기적으로 - 살았습니다.
최소 석 달은 자전거는 커녕 버스도 남의 부축으로 타야 할 위기였는데,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경계석(실은 제가 달려가고 있었지만)을 생각하면 목 뒤가 선뜻선뜻합니다.
저도 살고, 미돌이(자전거 이름)도 상처 하나 없고 멀쩡합니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멀쩡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들네미 살리려고 힘 한번 쓰셨나 봅니다.
없다, 이젠 자전거를 무리한 속도로 달리지 않습니다. 경제속도(누구 맘대로)로, 시속 20킬로대를 유지합니다.
사람 많은 곳에선 아예 산들바람 정도의 속도만 냅니다. 무작정 달리다간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위험해 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후, 정말, 십년감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