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이병은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렸다.
발 사이즈보다 10mm가량 더 큰 전투화 안에서 발이 자꾸 덜컥거리며 밀려댔지만 전혀 신경쓸 겨를이 없었는데, 머리를 감싸고 있는 철모가 앞뒤로 사정없이 흔들리며 종치듯 머리를 쳐댔기 때문이었고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군장이 한발짝씩 내딛을 때마다 위아래로 흔들리며 육중한 무게로 그의 중심을 뒤로 잡아끌었기 때문이었고 양손으로 받쳐든 자세로 들고있는 k-2소총의 무게가 조금씩 조금씩(100미터 당 0.5kg씩이라면 적당할 것이다) 무거워지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지랄맞은지는 도저히 정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 그가 즐겨 보던 ‘킹 라이언’ 이라는 ’TV만화가 있었다. 다섯 마리 사자가 합체를 해서 커다란 인간형 로봇으로 변신하곤 했는데, 백 이명은 지금 온몸 여기저기에서 조여들어오는 사소한 고통들이 마치 한 마리 한 마리의 사자로봇 같다고 생각했다.
한 마리 정도야 그리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지만 다섯 마리가 합체한 킹 라이언에게는 어떤 악당도 절대 당해내지 못하고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었다.
오르막의 경사가 점점 심해졌다. 260고지가 가까워지는 중이었고 백 이병의 눈에 고지 아래쪽 악몽같은 돌계단 - 마침내 다섯 번째 사자 - 가 들어왔다. 잠깐 멈춰서 숨을 고를까 생각했지만 그는 그냥 내달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섯 번째 사자는 합체했고 마침내 ‘킹 라이언 고통’이 완성되었으며 백 이병은 산소가 부족해진 머릿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실컷 즐겨라. 합체한 로봇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합체시간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는 거야.’
듬성듬성 박혀있는 돌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 백 이병은 260고지에 올라섰다.
약간 후들거리는 다리를 곧게 펴고 길게 참았던 숨을 내쉬자 다섯 마리 사자의 합체가 풀렸고 사자들은 천천히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져갔다. 얼굴에 느껴지는 차가운 밤 공기와 달리 온몸은 아침 내무반의 라이에이터 처럼 달아올라 있었고 땀으로 흠뻑 젖은 전투복은 막 빨아다가 라이에이터에 올려놓은 빨래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 익숙한 불쾌감을 선사했다.
그는 군생활에 나름대로 적응했다고 말할수도 있는 이등병의 마지막 한달을 보내고 있었고, 익숙하게 라이트 기능을 사용하지 않고 달빛으로 손목에 차고있는 돌핀 손목시계를 읽어냈다. 02시37분. 부대 뒷산 정상에 있는 260고지에서 막사에 다녀오는 데 약 25분 정도 걸린 셈이다. 이 정도면 산악달리기 부분 개인통산 최고기록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가 초등학교시절 100미터를 28초에 주파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키우는 10개월된 강아지보다 느린 인간을 보았다며 큰 소리로 비웃던 체육선생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사실 더 빨리 올수도 있었다. 오다가..
“너 오다가 자빠졌지.”
병장의 마지막 한달을 보내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저 인간은 달빛따위 없이 공기의 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호 안에 웅크리고 앉아 판쵸 우의를 덮고 덜덜 떨고있는 주제에 탄약고 정문에서 내가 넘어진 걸 어떻게 아는 거지?
“보,보였습니까?”
제대를 한달 앞두고... 아, 아니지. 02시니까 인제 가는날 빼고 29일 남았구나. 라고 날짜를 세고 있던 박청운 병장은 탄약고 정문 보초 박경환 상병이 딸딸이(군용전화)를 걸어서 낄낄대며 알려줬다는 말을 다 하기가 귀찮아서, 그냥 늘 하는대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너도 짬밥먹으면 다 알어.”
일상이 전설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가져 왔냐.”
“예 그렇습니다.”
“오다가 누구한테 걸리진 않았고?”
“예 그렇습니다.”
“더운물은 있었냐.”
“예 그렇습니다.”
“먹자.”
“예 그렇.. 아, 예 알겠습니다.”
백 이병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바지 양쪽 건빵주머니를 열고 걸레질 할때 말고는 가까이 가 볼 생각조차 못할 내무반 최고참님의 간물대를 뒤져 찾아온 봉지라면 두 개를 꺼냈다.
30분 전에 박 병장은 분명히 ‘두 개’를 챙겨오라고 말했고, 백 이병은 정확히 그때부터 들뜨기 시작했었다. 두 개중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임이 분명했고 적어도 박 병장은 입대한 후 라면이라는 물건을 제대로 구경도 해본적이 없는 후임병을 앉혀놓고 혼자 라면 두 개를 먹어치울 정도로 경우없는(왠지 적절한 표현이었다.) 인간은 아니었다. 백 이병은 신이 났다.
그래서 그는 건빵주머니에서 사각사각대며 허벅지를 긁어대는 라면봉지의 느낌을 미녀의 손길처럼 달콤하게 느끼며, 정수기에서 받은 뜨거운 물을 가득 채워넣은 수통을 허리 뒷춤에 엔진처럼 달고 무시무시한 주력을 발휘해 산길을 달려온 것이다.
마침내 첫 뽀글이를 맛보게 된 순간. 백 이병은 수통을 열었다. 군용 수통에 무슨 신기한 기능이 있는지 물의 온도는 아직도 손가락을 넣은 사람을 당장 팔딱팔딱 뛰어오르게 만들 수 있을만큼 뜨거웠고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 훌륭한 추진이라니.
박 병장이 익숙한 손길로 라면봉지에 물을 부었다. 그는 이 고지에 올라와서 처음 병장다운 모습을 보였는데, 한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았고 뜨거운 물이 들어차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뜨거워지는 부분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봉지를 잡았다.(안해 본 사람은 이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농심라면 명예의 전당 뽀글이 제작 부분에 오를만한 솜씨라고 백 이병은 생각했다.
“먹어. 다 익었다.”
“제...가 먹습니까?”
“군기 든 척하지 마 짜샤. 너 5초에 한번씩 힐끔힐끔 쳐다보는거 다 보였어.”
“.....”
“내가 두 개 다 먹을까 그럼?”
“아, 아닙니다 먹겠습니다.”
라면을 받아들고 봉지의 주둥이를 벌렸다. 맵싸한 라면국물 특유의 냄새가 단숨에 훅 불어왔다. 살짝 덜 익은 면발이 오동통하고 꼬불꼬불한 곡선을 국물 위로 드러내고 있었다.
미칠 듯한 반가움 현기증. 한달정도 참았던 담배를 처음 피우는 사람처럼 잠깐의 어지러움.
싸구려 스프로 만들어진 국물이 이토록 사람을 감동시키다니.
그는 봉지까지 삼킬 듯한 기세로 라면을 입속에 쏟아넣었다. 느긋하게 라면을 즐기는 방법을 이미 오래전에 터득한 박 병장이 채 절반을 먹기도 전이었다.
“....너 내가 안줬으면 총으로 쐈겠다 이자식아.”
“아히입.. 니다.”
“알았으니까 일단 삼켜.”
“.....”
전자시계는 초침이 없었고 적막한 산중에서 시간은 소리없이 흘렀다. 백 이병은 13시간동안 고수해온 자세로 참호 바깥쪽으로 총을 겨누고 이제는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서 별로 어둠같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노려 보고 있었다.
사이렌이 울리고 비상경계 명령이 떨어진게 오후 2시였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주변 부대에서 누군가 탈영을 하거나 실종되면 이렇게 몇백 평방미터 내에 있는 모든 군인들이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쯤은 이제 그리 어처구니 없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지만.
등 뒤에서 박 병장의 뿜어내는 담배연기가 형체를 가지고 등을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기를 내뿜는 숨소리가 시원하게 이어졌다.
“너 아까 대가리 박고 있던데 왜 그런거야.”
돌아보지 않아도 박 병장이 담배연기 머금은 입으로 말하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코로 입으로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
알싸하고 아늑해지는 담배연기. 잠시, 한발 물러서게 만들어주는 듯한 그 담배 연기.
백 이병은 담배가 몹시 피우고 싶었다. 아까 일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보셨습니까.”
“봤으니까 묻지.”
“이효성 상병한테 혼났습니다.”
“왜.”
“간물대에다가 사진 짱박아 놨다고 말입니다.”
“누구 사진.”
“.... 여자 사진입니다.”
“뺏겼냐.”
“뺏기진 않았습니다.”
빼앗기기 전에 제 손으로 콱 구겨버렸습니다,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박 병장도 그녀석이 안 빼앗았을 리가 없는데?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전자는 두려웠고 후자는 굳이 물어볼 필요 없이 앞뒤상황을 알만해서 귀찮았다.
군대라는 곳엔, 전국 팔도에서 별의별 놈들이 다 모여드는 법이다.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들이 같은 곳에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밥을 먹고 머릿속엔 언제나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그 안의 인간의 모습은 죄다 제각각이기 마련이고
상식적인 인간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전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간도 있다. 후임병의 여자친구 사진을 압수한다는 구실로 빼앗아 자기의 용도로 사용하는 이 상병같은 인간이 아주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군대라는 특수한 단체에서 특히 더 위험한데, 고문관 짓을 하든 또라이 짓을 하든 어쨌든 시간만 뭉개면 짬밥을 먹은 만큼 계급을 달기 마련이고 당당하게도 아랫사람들을 괴롭힐 권리를 취득해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박 병장도 이 상병이 후임병들에게 하는 짓을 보고 내가 저 녀석 밑으로 들어오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는 여자친구 사진이 들어있는 지갑을 괜히 한번 쓰다듬었다.
임마, 내가 군대에 쪼금만 늦게왔으면 어떤 또라이가 화장실에서 니 사진을 보면서 딸딸이를 쳤을지도 모른다구.
박 병장이 생각하기에, 백 이병의 고초는 아직 끝나지 않았을것 같았다.
이 상병이 누군가를 괴롭힐 때 대가리 박기는 첫 단계에 불과했다. 아마 백 이병은 상황이 끝나고 내무실에 들어가서도 편히 쉬기는 어려우리라.
박 병장은 또 ‘마음 기댈 곳’을 생각했다.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밤을. 내무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긴긴 시간을. 미친 듯한 추위 더위 끝나지 않는 삽질을 견디게 하는 것. 생각할 무엇. 그리워할 무엇.
기억이 묻어있는 사진 한 장이든, 항상 품고 다니다가 땀에 절어 다 번져버리고 지워져버린 편지 한 장이건. 기억나게 해 주는 것. 없으면 미쳐버릴 것.
“야.”
“이병 백XX.”
“너 나랑 자리좀 바꾸자.”
“.... 잘 못 들었습니다.”
“자리좀 바꾸자고.”
“왜 말입니까?”
“너무 오래 잤더니 허리가 결려. 허리좀 펴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호 바깥쪽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은 박 병장이 거치대에 총을 거치시켰다. 보지 않아도 뒤쪽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백 이병을 알 수 있었다.
“거기 앉아.”
“여기 말입니까?”
“그럼 어디에 앉을껀데. 내 무릎에 앉을래?”
“괘, 괜찮습니다.”
“너는 잘 모를거 같은데.. 내 짬밥 정도 되면 세상에서 제일 짜증나는게 뭔줄 아냐.”
“잘 모르겠습니다.”
“한번에 못알아듣고 같은 말 여러번 하게 만드는 거야. 지금 니가 하고 있는 짓.”
“죄송합니다.”
“그럼 앉아서 말 들어.”
“예 알겠습니다.”
박 병장이 내내 다리를 뻗은 자세로 앉아있던 자리에 백 이병이 앉았다. 박 병장이 체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주 현실적인 제안을 하나 할 테니까 잘 들어.”
“예 알겠습니다.”
“넌 계속 짱보고 난 계속 쉬었잖냐.”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 지금 정신이 너무 말짱하거든? 너는 쪼금 졸릴거고. 그러니까 내가 잠깐 보고있을 테니까 거기 우의 덮고 쫌 쉬고 있어. 이따 내가 졸리면 교대하자고.”
“괜찮습니다.”
“시끄러. 우의 덮어 얼릉.”
“....예 알겠습니다.”
“괜히 말시키지 말고 내가 부를때까지 쉬어. 자도 되니까.”
“안 자도 괜찮습니다.”
“자건 말건 니 맘대로 하라고. 그냥 쉬어.”
“...감사합니다.”
“지랄한다. 너 짱보다 쳐 잘까봐 그러는거야.”
“.....”
판쵸 우의 속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해서 덮은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다. 백 이병은 잠시 망설이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최대한 천천히 움직여서 뒤쪽 흙벽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잠시만 기대고 있겠다는 계획을 일부 수정해 박 병장이 뒤를 돌아볼때까지만 기대고 있기로 했다.
등만 받쳐줘도 얼마나 편안한가. 온 몸에 들어있던 힘을 풀고 백 이병은 편안하게, 자신의 몸 어디에도 힘을 주지 않은 자세를 취하며 이 세상 모든 의자에 붙어있는 등받이들을 축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그리던 백 이병의 생각은 정수리를 타고 미끄려져 내려가 버렸다. 미처 덜 마른 잉크를 문질러 지워 버리듯 갑자기 어마어마한 양으로 밀려온 피곤이 그의 생각을 지워 버렸다.
수백가지 글자와 그림과 이야기와 말들이 동시에 떠오르는 듯 하다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길게 꼬리를 남겼다. 전혀 잡히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손바닥을 가진 괴력의 사나이가 눈커플을 잡아 내렸다.
반항 할 수 없이 눈이 감겼다.
그의 발밑이 움직여 어디론가로 옮겨졌다. 빠르지 않게 전혀 힘들이지 않고. 백 이병은 기름칠을 잔뜩 해 놓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원한다면 뒤돌아 뛰어갈수도 있을 거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고 조용한 움직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인과관계와 일어날 수 있는 일들과 일어나선 안 되는 일들은 이제 조금도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눈앞의 하늘이 밝아졌다
부드러운 물결이 찰랑거리며 발목에 걸렸다. 전혀 차갑지 않았다.
해변이었다.
깊은 바다 속으로 잠겨 들어가기 전에 거쳐가는
익숙하고 낯선 바닷가.
그리고 약속처럼. 너무 다행스럽게도 전혀 구겨지지 않은 모습으로
그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 사이즈보다 10mm가량 더 큰 전투화 안에서 발이 자꾸 덜컥거리며 밀려댔지만 전혀 신경쓸 겨를이 없었는데, 머리를 감싸고 있는 철모가 앞뒤로 사정없이 흔들리며 종치듯 머리를 쳐댔기 때문이었고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군장이 한발짝씩 내딛을 때마다 위아래로 흔들리며 육중한 무게로 그의 중심을 뒤로 잡아끌었기 때문이었고 양손으로 받쳐든 자세로 들고있는 k-2소총의 무게가 조금씩 조금씩(100미터 당 0.5kg씩이라면 적당할 것이다) 무거워지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지랄맞은지는 도저히 정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 그가 즐겨 보던 ‘킹 라이언’ 이라는 ’TV만화가 있었다. 다섯 마리 사자가 합체를 해서 커다란 인간형 로봇으로 변신하곤 했는데, 백 이명은 지금 온몸 여기저기에서 조여들어오는 사소한 고통들이 마치 한 마리 한 마리의 사자로봇 같다고 생각했다.
한 마리 정도야 그리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지만 다섯 마리가 합체한 킹 라이언에게는 어떤 악당도 절대 당해내지 못하고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었다.
오르막의 경사가 점점 심해졌다. 260고지가 가까워지는 중이었고 백 이병의 눈에 고지 아래쪽 악몽같은 돌계단 - 마침내 다섯 번째 사자 - 가 들어왔다. 잠깐 멈춰서 숨을 고를까 생각했지만 그는 그냥 내달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섯 번째 사자는 합체했고 마침내 ‘킹 라이언 고통’이 완성되었으며 백 이병은 산소가 부족해진 머릿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실컷 즐겨라. 합체한 로봇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합체시간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는 거야.’
듬성듬성 박혀있는 돌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 백 이병은 260고지에 올라섰다.
약간 후들거리는 다리를 곧게 펴고 길게 참았던 숨을 내쉬자 다섯 마리 사자의 합체가 풀렸고 사자들은 천천히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져갔다. 얼굴에 느껴지는 차가운 밤 공기와 달리 온몸은 아침 내무반의 라이에이터 처럼 달아올라 있었고 땀으로 흠뻑 젖은 전투복은 막 빨아다가 라이에이터에 올려놓은 빨래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 익숙한 불쾌감을 선사했다.
그는 군생활에 나름대로 적응했다고 말할수도 있는 이등병의 마지막 한달을 보내고 있었고, 익숙하게 라이트 기능을 사용하지 않고 달빛으로 손목에 차고있는 돌핀 손목시계를 읽어냈다. 02시37분. 부대 뒷산 정상에 있는 260고지에서 막사에 다녀오는 데 약 25분 정도 걸린 셈이다. 이 정도면 산악달리기 부분 개인통산 최고기록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가 초등학교시절 100미터를 28초에 주파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키우는 10개월된 강아지보다 느린 인간을 보았다며 큰 소리로 비웃던 체육선생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사실 더 빨리 올수도 있었다. 오다가..
“너 오다가 자빠졌지.”
병장의 마지막 한달을 보내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저 인간은 달빛따위 없이 공기의 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호 안에 웅크리고 앉아 판쵸 우의를 덮고 덜덜 떨고있는 주제에 탄약고 정문에서 내가 넘어진 걸 어떻게 아는 거지?
“보,보였습니까?”
제대를 한달 앞두고... 아, 아니지. 02시니까 인제 가는날 빼고 29일 남았구나. 라고 날짜를 세고 있던 박청운 병장은 탄약고 정문 보초 박경환 상병이 딸딸이(군용전화)를 걸어서 낄낄대며 알려줬다는 말을 다 하기가 귀찮아서, 그냥 늘 하는대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너도 짬밥먹으면 다 알어.”
일상이 전설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가져 왔냐.”
“예 그렇습니다.”
“오다가 누구한테 걸리진 않았고?”
“예 그렇습니다.”
“더운물은 있었냐.”
“예 그렇습니다.”
“먹자.”
“예 그렇.. 아, 예 알겠습니다.”
백 이병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바지 양쪽 건빵주머니를 열고 걸레질 할때 말고는 가까이 가 볼 생각조차 못할 내무반 최고참님의 간물대를 뒤져 찾아온 봉지라면 두 개를 꺼냈다.
30분 전에 박 병장은 분명히 ‘두 개’를 챙겨오라고 말했고, 백 이병은 정확히 그때부터 들뜨기 시작했었다. 두 개중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임이 분명했고 적어도 박 병장은 입대한 후 라면이라는 물건을 제대로 구경도 해본적이 없는 후임병을 앉혀놓고 혼자 라면 두 개를 먹어치울 정도로 경우없는(왠지 적절한 표현이었다.) 인간은 아니었다. 백 이병은 신이 났다.
그래서 그는 건빵주머니에서 사각사각대며 허벅지를 긁어대는 라면봉지의 느낌을 미녀의 손길처럼 달콤하게 느끼며, 정수기에서 받은 뜨거운 물을 가득 채워넣은 수통을 허리 뒷춤에 엔진처럼 달고 무시무시한 주력을 발휘해 산길을 달려온 것이다.
마침내 첫 뽀글이를 맛보게 된 순간. 백 이병은 수통을 열었다. 군용 수통에 무슨 신기한 기능이 있는지 물의 온도는 아직도 손가락을 넣은 사람을 당장 팔딱팔딱 뛰어오르게 만들 수 있을만큼 뜨거웠고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 훌륭한 추진이라니.
박 병장이 익숙한 손길로 라면봉지에 물을 부었다. 그는 이 고지에 올라와서 처음 병장다운 모습을 보였는데, 한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았고 뜨거운 물이 들어차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뜨거워지는 부분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봉지를 잡았다.(안해 본 사람은 이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농심라면 명예의 전당 뽀글이 제작 부분에 오를만한 솜씨라고 백 이병은 생각했다.
“먹어. 다 익었다.”
“제...가 먹습니까?”
“군기 든 척하지 마 짜샤. 너 5초에 한번씩 힐끔힐끔 쳐다보는거 다 보였어.”
“.....”
“내가 두 개 다 먹을까 그럼?”
“아, 아닙니다 먹겠습니다.”
라면을 받아들고 봉지의 주둥이를 벌렸다. 맵싸한 라면국물 특유의 냄새가 단숨에 훅 불어왔다. 살짝 덜 익은 면발이 오동통하고 꼬불꼬불한 곡선을 국물 위로 드러내고 있었다.
미칠 듯한 반가움 현기증. 한달정도 참았던 담배를 처음 피우는 사람처럼 잠깐의 어지러움.
싸구려 스프로 만들어진 국물이 이토록 사람을 감동시키다니.
그는 봉지까지 삼킬 듯한 기세로 라면을 입속에 쏟아넣었다. 느긋하게 라면을 즐기는 방법을 이미 오래전에 터득한 박 병장이 채 절반을 먹기도 전이었다.
“....너 내가 안줬으면 총으로 쐈겠다 이자식아.”
“아히입.. 니다.”
“알았으니까 일단 삼켜.”
“.....”
전자시계는 초침이 없었고 적막한 산중에서 시간은 소리없이 흘렀다. 백 이병은 13시간동안 고수해온 자세로 참호 바깥쪽으로 총을 겨누고 이제는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서 별로 어둠같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노려 보고 있었다.
사이렌이 울리고 비상경계 명령이 떨어진게 오후 2시였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주변 부대에서 누군가 탈영을 하거나 실종되면 이렇게 몇백 평방미터 내에 있는 모든 군인들이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쯤은 이제 그리 어처구니 없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지만.
등 뒤에서 박 병장의 뿜어내는 담배연기가 형체를 가지고 등을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기를 내뿜는 숨소리가 시원하게 이어졌다.
“너 아까 대가리 박고 있던데 왜 그런거야.”
돌아보지 않아도 박 병장이 담배연기 머금은 입으로 말하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코로 입으로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
알싸하고 아늑해지는 담배연기. 잠시, 한발 물러서게 만들어주는 듯한 그 담배 연기.
백 이병은 담배가 몹시 피우고 싶었다. 아까 일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보셨습니까.”
“봤으니까 묻지.”
“이효성 상병한테 혼났습니다.”
“왜.”
“간물대에다가 사진 짱박아 놨다고 말입니다.”
“누구 사진.”
“.... 여자 사진입니다.”
“뺏겼냐.”
“뺏기진 않았습니다.”
빼앗기기 전에 제 손으로 콱 구겨버렸습니다,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박 병장도 그녀석이 안 빼앗았을 리가 없는데?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전자는 두려웠고 후자는 굳이 물어볼 필요 없이 앞뒤상황을 알만해서 귀찮았다.
군대라는 곳엔, 전국 팔도에서 별의별 놈들이 다 모여드는 법이다.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들이 같은 곳에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밥을 먹고 머릿속엔 언제나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그 안의 인간의 모습은 죄다 제각각이기 마련이고
상식적인 인간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전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간도 있다. 후임병의 여자친구 사진을 압수한다는 구실로 빼앗아 자기의 용도로 사용하는 이 상병같은 인간이 아주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군대라는 특수한 단체에서 특히 더 위험한데, 고문관 짓을 하든 또라이 짓을 하든 어쨌든 시간만 뭉개면 짬밥을 먹은 만큼 계급을 달기 마련이고 당당하게도 아랫사람들을 괴롭힐 권리를 취득해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박 병장도 이 상병이 후임병들에게 하는 짓을 보고 내가 저 녀석 밑으로 들어오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는 여자친구 사진이 들어있는 지갑을 괜히 한번 쓰다듬었다.
임마, 내가 군대에 쪼금만 늦게왔으면 어떤 또라이가 화장실에서 니 사진을 보면서 딸딸이를 쳤을지도 모른다구.
박 병장이 생각하기에, 백 이병의 고초는 아직 끝나지 않았을것 같았다.
이 상병이 누군가를 괴롭힐 때 대가리 박기는 첫 단계에 불과했다. 아마 백 이병은 상황이 끝나고 내무실에 들어가서도 편히 쉬기는 어려우리라.
박 병장은 또 ‘마음 기댈 곳’을 생각했다.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밤을. 내무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긴긴 시간을. 미친 듯한 추위 더위 끝나지 않는 삽질을 견디게 하는 것. 생각할 무엇. 그리워할 무엇.
기억이 묻어있는 사진 한 장이든, 항상 품고 다니다가 땀에 절어 다 번져버리고 지워져버린 편지 한 장이건. 기억나게 해 주는 것. 없으면 미쳐버릴 것.
“야.”
“이병 백XX.”
“너 나랑 자리좀 바꾸자.”
“.... 잘 못 들었습니다.”
“자리좀 바꾸자고.”
“왜 말입니까?”
“너무 오래 잤더니 허리가 결려. 허리좀 펴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호 바깥쪽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은 박 병장이 거치대에 총을 거치시켰다. 보지 않아도 뒤쪽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백 이병을 알 수 있었다.
“거기 앉아.”
“여기 말입니까?”
“그럼 어디에 앉을껀데. 내 무릎에 앉을래?”
“괘, 괜찮습니다.”
“너는 잘 모를거 같은데.. 내 짬밥 정도 되면 세상에서 제일 짜증나는게 뭔줄 아냐.”
“잘 모르겠습니다.”
“한번에 못알아듣고 같은 말 여러번 하게 만드는 거야. 지금 니가 하고 있는 짓.”
“죄송합니다.”
“그럼 앉아서 말 들어.”
“예 알겠습니다.”
박 병장이 내내 다리를 뻗은 자세로 앉아있던 자리에 백 이병이 앉았다. 박 병장이 체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주 현실적인 제안을 하나 할 테니까 잘 들어.”
“예 알겠습니다.”
“넌 계속 짱보고 난 계속 쉬었잖냐.”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 지금 정신이 너무 말짱하거든? 너는 쪼금 졸릴거고. 그러니까 내가 잠깐 보고있을 테니까 거기 우의 덮고 쫌 쉬고 있어. 이따 내가 졸리면 교대하자고.”
“괜찮습니다.”
“시끄러. 우의 덮어 얼릉.”
“....예 알겠습니다.”
“괜히 말시키지 말고 내가 부를때까지 쉬어. 자도 되니까.”
“안 자도 괜찮습니다.”
“자건 말건 니 맘대로 하라고. 그냥 쉬어.”
“...감사합니다.”
“지랄한다. 너 짱보다 쳐 잘까봐 그러는거야.”
“.....”
판쵸 우의 속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해서 덮은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다. 백 이병은 잠시 망설이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최대한 천천히 움직여서 뒤쪽 흙벽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잠시만 기대고 있겠다는 계획을 일부 수정해 박 병장이 뒤를 돌아볼때까지만 기대고 있기로 했다.
등만 받쳐줘도 얼마나 편안한가. 온 몸에 들어있던 힘을 풀고 백 이병은 편안하게, 자신의 몸 어디에도 힘을 주지 않은 자세를 취하며 이 세상 모든 의자에 붙어있는 등받이들을 축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그리던 백 이병의 생각은 정수리를 타고 미끄려져 내려가 버렸다. 미처 덜 마른 잉크를 문질러 지워 버리듯 갑자기 어마어마한 양으로 밀려온 피곤이 그의 생각을 지워 버렸다.
수백가지 글자와 그림과 이야기와 말들이 동시에 떠오르는 듯 하다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길게 꼬리를 남겼다. 전혀 잡히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손바닥을 가진 괴력의 사나이가 눈커플을 잡아 내렸다.
반항 할 수 없이 눈이 감겼다.
그의 발밑이 움직여 어디론가로 옮겨졌다. 빠르지 않게 전혀 힘들이지 않고. 백 이병은 기름칠을 잔뜩 해 놓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원한다면 뒤돌아 뛰어갈수도 있을 거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고 조용한 움직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인과관계와 일어날 수 있는 일들과 일어나선 안 되는 일들은 이제 조금도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부드러운 물결이 찰랑거리며 발목에 걸렸다. 전혀 차갑지 않았다.
해변이었다.
깊은 바다 속으로 잠겨 들어가기 전에 거쳐가는
익숙하고 낯선 바닷가.
그리고 약속처럼. 너무 다행스럽게도 전혀 구겨지지 않은 모습으로
그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험담.. 이라고 해도 좋을 이야기를 그냥 한번 3인칭으로 써 보고 싶어서요. 근데 역시 민망합니다-_- 사진은 스캔한 겁니다. 이 이야기와 관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